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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天問天答 109

담선공부모임 | 기사입력 2017/04/17 [06:38]
‘나’와 ‘삶’과 ‘진리’와 ‘신’은 무조건적으로 一體

통찰! 天問天答 109

‘나’와 ‘삶’과 ‘진리’와 ‘신’은 무조건적으로 一體

담선공부모임 | 입력 : 2017/04/17 [06:38]
연재 취지-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밝힌다
인간이 역사를 이어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인간들은 그러한 역경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실감 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타파해 줄 -무언가-에 의지하고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 시켜줄 -무언가-를 찾아서
인류문명과 문화가 발전을 해 왔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오해로 인한 대립이 극에 치달았고,
그로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보다, 이념가치보다,
사상가치보다, 종교적 가치보다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비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와 함께 많은 분들이 지성적 이해를 통해 무지의 실체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침으로 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나가고자 이 글을 연재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지성 인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믿든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그러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은 상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식과 인간정신과 더불어
보편진리와의 거부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밝혀나가 보고자 합니다.

‘나’와 ‘삶’과 ‘진리’와 ‘신’은 무조건적으로 一體
 
질문227: 고난과 역경에 맞서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삶’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진경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단언컨대 성직자라 할지라도, 수행자라 할지라도, 이름난 철학자라 할지라도 무슨 소용과 효용이 있겠습니까?
 
‘삶’에 대한 이해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삶’은 고난과 역경도 허용하고, 전쟁과 불행조차 허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삶’은 어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이해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 그렇다면, ‘삶’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한 것입니까?
 
‘살아지고’ 있는 삶에는 어떤 기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지고’ 있는 모든 삶이 결국은 무한(無限)으로서 실체인 ‘진리’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살아지고’ 있는 삶, 즉 불현 듯 깨어질 수가 있는 꿈속에서, 불현 듯 사라질 수가 있는 ‘지금의 나’의 측면에서 어떤 이해를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질문): 그렇다면, 진경님이 이야기 하는 ‘삶’에 대한 이해는 무엇입니까?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도망쳐, 마음의 평화와 행복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즉 ‘살아간다’고 믿고 있는 ‘지금의 나’는, 단지 ‘살아지게’ 하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관계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살아간다’고 믿고 있는 ‘살아지고 사라지는’ 삶의 주체가 아니라, ‘살아지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삶’ 그 자체로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와 무엇’으로 대변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질문): ‘나’에 대한 이해만이 ‘삶’에 대한 이해로, ‘나’에 대한 이해만이 ‘진리’에 대한 이해로, ‘나’에 대한 이해만이 ‘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와 ‘삶’과 ‘진리’와 ‘신’에 대한 이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삶’과 ‘진리’와 ‘신’은 무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조건적으로 일체(一體)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이해(理解)라는 것은 없다고 하시니 역설적인 표현입니까?
 
아닙니다. 사실적입니다. 왜냐하면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誤解)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참다운 이해’는 이해로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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